*정경(丁經, Claudio Jung)(www.claudiojung.com)
바리톤 성악가. 오페라와 드라마를 융합한 '오페라마(Operama)'를 창시했으며, 예술경영학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사)오페라마 예술경영연구소(www.operama.org) 소장으로 한세대학교 예술경영학과에 재직 중이다. 저서 '오페라마 시각(始覺)'.

▲ 오페라마 예술경영연구소 정경 소장

'20세기 최고의 테너', '오페라의 제왕', '음악계의 진정한 르네상스 맨'.

모두 단 한 명의 예술가에게 표하는 찬사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이른바 '빅3 테너'로 불린다. 나는 유려한 가창력과 다부진 음색으로 전 세계 클래식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를 이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상인'으로서 조명해보고자 한다.

스페인 마드리드 출신의 도밍고는 바리톤으로 데뷔해 만 20세에 테너로 전향했다. 다양한 오페라를 통해 꾸준히 내공을 쌓아가던 그가 일약 스타덤에 오른 것은 1968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였다. 선배 가수인 프랑코 코렐리의 대역으로 오른 이 공연이 대성공을 거두며 성악계의 신성으로 떠올랐다.
 
지난 2009년, 그는 68세 나이에 다시금 바리톤으로 전향하며 제2의 음악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테너로서 누린 명예와 영광의 시간에 머무르거나 은퇴를 택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다시 시험대에 던졌다. 이는 파바로티나 카레라스와는 분명 다른 행보였다.

파바로티는 뛰어난 성악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협소한 레퍼토리(연주자가 실연(實演)할 수 있는 배역과 곡의 범위)로 안정지향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곤 했고, 카레라스 역시 소리만을 위해 연기를 외면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도밍고는 일흔을 바라보는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바리톤에서 테너, 다시 바리톤으로 음역의 높낮이를 바꾸면서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다채로운 배역을 소화했다. 모국어인 스페인어는 물론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 배역까지 맡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현재 총 126개의 배역을 소화해 낸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이미 발매된 그의 음반만 100여 개가 넘으며, 이 가운데 8개 음반이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그는 미지의 세계에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과 정열 가득한 예술혼의 소유자로서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는 기초예술계의 거장이라는 입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중문화예술과의 크로스오버 작업에도 매진했다. 지난 1981년, 미국의 팝 가수 존 덴버와 함께 발표한 '퍼햅스 러브(Perhaps Love)'를 기억할 것이다. 당시 그의 파격적인 행보는 대중문화와 기초예술의 간극이 극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장르를 불문한 전 세계 음악 팬들의 뇌리에 플라시도 도밍고의 이름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총 3차례의 내한공연을 가졌는데 특히 1995년 공연에서는 정확한 발음으로 '그리운 금강산'을 가창해 우리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문화, 예술세계 어디에도 경계나 한계선을 긋지 않았다.

동료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는 대립을 지양하고 동업자 정신을 추구했다. 1987년 급성 백혈병 판정을 받은 카레라스가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을 때 몰래 도와준 사람이 바로 도밍고였다. 그는 자신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카레라스의 자존심을 배려해 자선재단의 이름으로 거액을 기부했다. 이후 카레라스가 자신을 도운 이가 도밍고였음을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은 막역지우가 되었다.

치료를 시작한 지 1년여 만에 카레라스는 기적처럼 건강을 되찾았고, 1990년 쓰리 테너는 로마 월드컵 전야에 역사적인 첫 합동 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의 음반은 1200만 장이라는 경이로운 판매고를 기록하며 클래식 분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쓰리 테너는 이후에도 2005년 마지막 공연이 막을 내릴 때까지 수많은 음반과 공연, 대기록들을 남겼다.

도밍고는 기초예술의 순수성을 지키는 대신 대중문화와 결탁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쓰리 테너의 공연 역시 고전으로서의 덕목을 잊은 상업적 무대였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그가 지휘자로 활동을 시작할 때에는 '지나친 활동 영역 확장'이라는 지탄이 쇄도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기획 예술가로서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를 창시해 성악계 후학 양성에도 이바지하고 있으며, LA오페라극장과 워싱턴내셔널극장 총감독을 맡아 오페라 행정가로도 활약하고 있다. 이처럼 그가 종합 예술가로서 끊임없이 레퍼투아(repertoire)를 넓혀나간 덕분에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예술작품의 숫자와 아름다움이 배가된 것은 아닐까.
 
플라시도 도밍고의 도전정신, 장르와 문화권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열린 의식은 진정한 예술상인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나 자신을 포함해 앞으로의 기초예술가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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