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丁經, Claudio Jung)(www.claudiojung.com)
바리톤 성악가. 오페라와 드라마를 융합한 ‘오페라마(Operama)’를 창시했으며, 예술경영학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사)오페라마 예술경영연구소(www.operama.org) 소장으로 한세대학교 예술경영학과에 재직 중이다. 저서 ‘오페라마 시각(始覺)’.

▲ 오페라마 예술경영연구소 정경 소장

성악가인 나는 주인공으로서 무대에 서는 일이 잦다. 클래식을 작곡하는 이들이 전통적으로 인간의 목소리를 가장 존귀한 악기로 여긴 까닭이다. 그런데 이러한 클래식의 불문율을 처음으로 깨트린 작곡가가 있었다. 바로 루드비히 반 베토벤이다.

그는 교향곡 '합창'을 작곡하면서 악단을 구성하고 있는 악기 가운데 하나를 사람의 목소리와 동일한 비중으로 잡았다. 또한 합창단을 오케스트라 뒤편으로 배치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당대 음악계에서는 이 모든 시도가 상당히 실험적이고 신선한 것이었다. 때문에 교향곡 '합창(Symphony no.9)'은 오늘날까지도 베토벤의, 그리고 클래식계의 최고 역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놀라운 점은 합창이 만들어진 당시, 베토벤은 이미 청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는 점이다. 작곡을 하는 동안에도, 합창의 첫 무대를 관람하면서도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아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야만 했다.

음악가에게는 사실상 사형 선고와도 같은 청력의 부재 속에 베토벤이 그처럼 뛰어난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천부적인 재능이나 노력, 몰입, 광기 등 여러 요소들이 복합되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베토벤을 가장 혹독하게 채찍질한 마부는 바로 '비평'과 '비판'이었다고 생각한다.

베토벤은 이와 같은 쓴소리에 매우 민감한 편이었다. 평론가들의 평가에 상심하기도 하고, 완성을 앞둔 곡을 폐기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비평을 귀담아 듣는 예술가였다. 평론가와 대중의 반응으로부터 나아갈 방향을 가늠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자존심 세고 긍지 높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혹평을 들으면 크게 두 가지의 극단적인 반응을 보인다. 예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문외한들의 언사라 치고 완전히 무시하거나, 비평에 대해 적극적인 반론을 펼치는 것이다.

베토벤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는 혹평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그 속에서 배울 점이 있는지 찾아 헤맸으며, 비평과 여론을 토대로 자신의 작품을 더욱 견고하게 구축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다. 한 번 평론에서 지적된 내용이 다시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

얼마 전, 내가 재직하고 있는 오페라마 예술경영연구소에서 기획한 한 공연이 상연되었다. 청중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고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구소 직원 한 명이 내게 어떤 리뷰를 발견했다면서 글 하나를 보내주었다.
 
그것은 우리 공연에 대한 혹평이었다. 주제의식의 불투명함과 비일관성, 내용 구성의 부실함, 무대에 올리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이해 부족과 표현력의 깊이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야심차게 준비한 공연이 혹평을 받자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공감이 되는 부분이 생기면서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는 그 글을 읽고 또 읽으며 외우다시피 했다. 급기야 인쇄물로 만들어 전 연구원들에게 배부했다. 우리는 전에 없던 긴장 속에 '보수 작업'과 '발전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후 나는 직접 비평글을 작성한 글쓴이에게 연락해 진심어린 감사와 사과의 뜻을 전했다. 돈을 지불하고 공연을 즐기러 온 관객이 느낀 불만족에 대한 사과와 함께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실마리를 전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이야기했다.

그분 역시 직접 연락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면서 본의 아니게 혹평이 되었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더 좋은 예술가와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더욱 발전해 있을 다음 공연을 기대하겠다고 화답해주었다.

항상 옳은 방향으로만 나아갈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때로 벽에 부딪히기도, 바람에 떠밀리기도 하면서 불안함과 두려움 속에 발걸음을 옮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날카로운 언어들은 다소 가시가 있어 아플지언정 우리 삶에서 어떤 부분이 균형을 잃고 있는지를 깨우쳐주는 가장 확실하고도 견고한 이정표이다. 비록 잠시 아플지라도 더욱 큰 그림에서 나를 이끌어 주는, 비평가와 평론가를 나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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